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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차왕 엄복동 도둑 실화 손익분기점 민효린

자전차왕 엄복동


도둑 실화 손익분기점 민효린

정지훈 강소라 이시언 이범수


자전차왕 엄복동 개봉일

2019년 2월 27일

영화 <항거>와 같은날 개봉


자전차왕 엄복동 상영시간

118분

▲ 쉐어하우스 전문카페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줄거리

일제강점기, 일본에서는 조선의 민족의식을 꺾고 

 그들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조선자전차대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일본 최고의 선수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엄복동의 등장으로 

 일본의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계속되는 무패행진으로 ‘민족 영웅’으로 떠오른 

 그의 존재에 조선 전역은 들끓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자전차 대회는 그저

쾌감만 불러일으키는 스포츠 대회가 아닌

조선 사람들의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것이었던것.

  

총,칼로 일본인 한놈을 죽이는 것보다

필요했던 조선사람들의 의지.

그는 그 역할의 중심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승리는 이천만의 가슴 속에 조선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었으며 1919년 3·1운동의 민중들로 하여금 나라의 독립이라는 희망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

라는 말에 엄청나게 논리적으로 비판한 리뷰가 있었는데 솔직히 난 너무 논리적이어서 리뷰에 별로라는 글들의 이유를 이해할 정도였다.  이 영화를 볼 마음이 있다면 꼭 보길 추천한다.

영화를 보는데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www.medias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12


자전차왕 엄복동 출연진

자전차왕 엄복동 정지훈

자전차왕 엄복동 정지훈

남다른 열정으로 충무로를 넘어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으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정지훈은 이번 작품에서 실존 인물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는 훈련을 감행했다. 한국체육대학교 사이클팀 코치진과 함께 피나는 자전거 훈련에 매진한 결과, 정지훈은 영화 속 모든 자전차 경주 장면을 직접 소화하며 실제 선수 못지않은 실력으로 영화에 박진감을 더했다.

자전차왕 엄복동 강소라

자전차왕 엄복동 강소라

애국단의 행동대원 ‘김형신’ 

극 중 총격씬과 폭파씬에 이어 격투씬까지 강도 높은 액션 씬들을 소화하기 위해 꾸준한 액션 훈련을 감내해야 했다. 박영식 무술감독은 현장에서 가장 고생한 배우로 강소라를 손꼽으며 “남자도 소화하기 어려운 총격 액션과 폭파 액션, 바디 액션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전차왕 엄복동 이범수

자전차왕 엄복동 이범수


엄복동의 스승이자 일미상회의 사장 ‘황재호’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카리스마있는 리더

이범수는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의 제작자 를 맡았다.

자전차왕 엄복동 이시언

자전차왕 엄복동 이시언

엄복동의 절친이자 일미상회 소속 자전차 선수 ‘이홍대''

김희원

김희원

같은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애국단을 몰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친일파 ‘사카모토’

고창석

고창석

 ‘사카모토’(김희원)에게 쫓기
 애국단의 행동대장 ‘안도민’ 

자전차왕 엄복동 민효린

자전차왕 엄복동 민효린

일미상회 선수단의 매니저 ‘경자’

당돌하지만 사랑스러운 매력의 감초 역할을 한다.

박진주

박진주

엄복동(정지훈) 여동생 ‘봉선’

이경영

이경영

엄복동의 아버지

자전차왕 엄복동 실화

 자전차왕 엄복동 실화

1913년 4월 13일 용산에서 개최된 자전차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이후, 출전하는 대회마다 일본 선수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고 특히 1923년 중국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며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를 휩쓴 ‘동양 자전차왕’으로 자리매김했다. ‘엄복동’이 출전하는 자전차 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당시 경성 인구 30만 명 중 10만여 명이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억눌린 가슴을 달래주는 시대의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다. 당시 조선인들의 ‘엄복동’을 향한 응원은 실로 엄청났는데, 실제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노래가 전국에서 유행했을 정도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대의 특성상, 체계적인 훈련이나 나라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로 61km를 출퇴근하며 꾸준히 노력한 결과, 15년간 우승기를 놓치지 않았던 전설적인 선수였다.

‘엄복동’의 승리에 격분한 일본인들이 그를 집단 구타하기 시작하자 이에 격분한 조선 관중들은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소리치며 경기장으로 쏟아져 나왔고, 결국 한일간의 난투극으로 확대되게 된 것이다. 일본 경찰의 진압으로 마무리되었던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엄복동’과 그의 우승이 갖는 의미가 단순히 스포츠에 그치는 것이 아닌, 민족의 승리이자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가 쫓아옴을 보고 더욱 용맹을 내어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군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 다정다한한 십만 동포의 박수갈채하는 가운데에 감사한 눈물로 동포의 다대한 열성을 사례하며···” 

 [매일신보, 1913년 4월 15일] 

  

 “경복궁 안에 시민대운동회는 마침 일기가 청명하여 순서를 좇아 잘 진행하는 중... 엄복동군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남아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군은 삼십여 회를 돌고 다른 일본사람이 엄군보다 몇 회를 뒤떨어져 영예의 일등은 의심 없이 엄군의 어깨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군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일등을 아니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우승기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까짓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하느냐”고 우승기를 잡아꺾으매 옆에 있던 일본사람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엄군을 구타하야...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어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형형색색에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동아일보, 1920년 5월 3일] 

  

 "이렇듯 인기가 상승되는 존재로 부각되자 일본인 각 자전거점에서는 그를 회유시켜 끌어오려 했지만 그는 결연히 거절함으로써 자기에게 보내진 민족의 기대를 헛되이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에서 개최되는 자전거 경기에는 참가를 거부했다.” 

 [《한국인물대계》(1972)]

자전차왕 엄복동 도둑

하지만 이런 조선의 영웅적인물 엄복동은 그 옛날의 명성도 어디로 생활에 궁한 나머지 생전 자전거 수십 대를 훔쳐 장물로 팔았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다. 최초 보도는 1926년, 마지막은 1950년으로 자전거 도둑 특성상 그 사이 확인되지 않은 더 많은 수의 자전거를 훔쳤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당시 자전거는 지금의 자전거와 위상이 다른 상당히 비쌌던 물건이다. 1950년 절도사건의 경우 3만원이라고 가격이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해방 이후 화폐개혁과 물가상승 때문에 정확하게 현대 화폐단위로 가치를 내리긴 어렵지만, 한국은행에서 추산한 이 2005년 기사를 참고하면 해방 직후 1만원의 가치는 현대의 약 10억 7천만원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즉 엄복동은 1950년 32억어치 자전거를 훔치려 했고 현대의 왠만한 고급 외제차를 훔친 셈인 것.

자전거가 왜이리 비싸냐고 의아해 할 수 있으나, 당시 공업기술은 지금만큼 좋지 않았기에 정밀한 부품으로 구성된 자전거는 제작 난이도가 매우 높았으며, 대부분 수제로 조립되었으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철, 구리, 알루미늄같은 산업 필수 금속의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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